프랑스혁명과 함께 탄생한 미터법
도량형(度量衡)은 실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미터법이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고기를 살 때엔 근(斤)을, 집의 크기를 가늠할 때엔 평(坪)을 사용한다. 그런데 기존의 체제를 뒤엎는 혁명이 발생한다면? 구시대의 것을 싹 갈아엎기에 이만한 때가 없다.
혁명 이전 프랑스에는 약 800개의 이름으로 25만 개나 되는 도량 단위가 사용되고 있어 엄청난 사회혼란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에 더해 굶주린 프랑스 국민들에게 정확하지 않은 도량 단위로 징수한 세금들은 내부의 불만을 가속화했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기폭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사실 프랑스에서 통일된 도량형의 필요성은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는데 그 또한 프랑스혁명 이전의 혼란한 사회로 인한 도량형 통일의 필요성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던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왕실의 후원을 받아 연구를 하기 시작했는데 연구 도중 프랑스혁명이 발생해버렸다. 하지만 연구는 멈추지 않았고 꾸준히 진행된 결과 프랑스혁명의 산물로 남게 되었다. 17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연구는 1793년 미터를 정의 내리고도 사용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데 그 이유는 보다 정확한 단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야 한다.
조선시대 최초로 중국의 것이 아닌 우리만의 도량형을 만든 세종대왕의 몸에 들어갔다고 가정을 해 보자. 만약 본인이라면 어떤 기준으로 도량형을 만들겠는가? 물론 우리는 현재 미터법이라는 것이 몸에 익어있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체계를 생각해 내겠지만 현재의 미터법을 알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어떤 기준으로 도량형을 정해야 할까? 이에 세종대왕은 사람에 따라 다른 신체의 일부와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음악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변하지 않는 기준을 잡았다.
이는 프랑스의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원기를 잃어버리더라도 언제라도 다시 원기를 만들어내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791년 프랑스 전국의 대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고 그 결과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 길이의 천만분의 1을 '1미터'라 명명하게 되었다. 당시 회의를 했던 과학자들이 생각한 불변의 기준은 지구였던 것이다. 이렇게 길이를 정하고 난 후 무게와 부피를 정의하게 되었는데 1L는 가로, 세로, 높이가 1m인 정육면체에 들어가는 양의 1000분의 1로, 1kg은 밀도가 가장 큰 4℃의 물이 1L의 용기에 들어가는 무게로 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기준인 지구의 둘레를 바탕으로 만든 1미터이지만 지구의 둘레는 어떻게 측정했을까?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지 못하다면 아무리 좋은 정의를 했더라도 그 길이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1792년 두 명의 천문학자가 지구의 둘레 측정에 나서게 된다. 이 두 천문학자는 프랑스 북쪽의 됭케르크에서부터 파리를 거쳐 바르셀로나를 있는 직선의 자오선 길이를 측정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일부의 구간을 정밀하게 측정해 동그란 지구에 적용하기 위함이었다. 이 과정은 삼각측량을 이용해 측정하였고 생각보다 쉽지 않아 1년이 걸릴 줄 알았던 원정이 6년이 지나서야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 변하지 않는 정의를 했고 긴 시간동안 정밀한 측정을 해서 만든 미터법이었으나 이마저도 불변의 것이 아니었다. 지구의 크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고 물의 밀도도 4℃가 아닌 3.984℃에서 최대 밀도를 가진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되지는 않았다. 미터법을 공표하며 기준으로 삼는 원기를 만들었고 언제든 원기를 통해 재측정을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원기를 잃어버렸다면 다른 곳에서 보관중인 원기를 찾아 측정을 하면 됐지만 원기 자체가 시간이 지나며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지구의 둘레부터가 변하고 있는데 원기까지 변한다면 기준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그 시대에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미터를 재정의했고 현재는 1983년 불변의 속도인 빛을 이용한 정의(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가 사용되고 있다.
빛을 이용해 미터는 더 이상 원기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킬로그램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원기를 사용해 그 무게를 정의했었다. 원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외부의 변수 때문에 부정확할 수가 있었기에 2019년 플랑크 상수를 통해 새롭게 정의를 했다. 플랑크 상수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변하지 않는 자연의 상수(6.62607015 × 10^-34 m^2 kg / s)인데 이것의 단위가 [m^2 kg / s]로 자세히 보면 이미 정의가 된 미터와 초가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미 정의된 값을 플랑크 상수에 넣으면 불변의 킬로그램 정의를 얻을 수 있다. 물론 미래에 더욱 정밀한 측정을 통해 빛의 속도나 플랑크 상수의 소숫점이 더 구해진다면 달라지겠지만...
미국은 왜 미터법을 쓰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밀하게 측정되고 정의된 글로벌 스탠더드 미터법을 왜 미국은 왜 사용하지 않을까? 현재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고 야드 파운드 법(미국 관용 단위계)을 사용하는 나라는 지구 상 단 3 나라가 남아있다. 미국, 라이베리아, 미얀마가 그 주인공인데 하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야드 파운드 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굉장한 사회적 비용이 낭비되고 있다. 실제로 현업에서도 장비를 구매할 때 미국의 장비를 잘못 구매하면 mks단위가 아닌 장비가 와 곤란하기도 하고 미국의 원서로 공부하는 수많은 공대생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굉장한 시련을 주고 있다.
이는 실생활 밀착형이라 직관적으로 사용하기에 편한 단위들이 사용되고 있어 미국인들의 생활엔 더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도량형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터법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던 미국의 당시 상황을 살펴본다면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인들은 철저한 고립주의 노선을 택했다. 물론 결국 참전을 하기는 했지만 일본이 미국은 절대 참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진주만을 공격할만큼 당시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은 확고했다. 특히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주를 한 많은 유럽인들 또한 자주 전쟁이 발생하던 유럽의 땅을 피해 바다를 건너서까지 온 사람들이라 유럽과 엮인다면 다시 한번 피바람이 몰아칠 것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 미국인들끼리 통용되는 단위로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바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계화된 지금은 바꿔야 하지 않을까? 소소한 사회적 비용뿐만 아니라 미터법과 야드파운드법의 단위 혼동으로 인해 3억 3천만 불짜리 화성 궤도선을 날려먹은 경험도 했을 만큼 이제는 그 불편함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오죽하면 매번 대선 후보의 공약이 미터법을 사용하는 것임에도 아직까지도 바뀌지 않았으니 말이다.
도량형 통일의 역사 - 글로벌 스탠더드 미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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